[비마이너]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이 있단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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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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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함께 살면 제 장애가 사라집니까? 저는 뇌성마비로 인한 중증 뇌병변장애인입니다. 경직으로 걷지 못하고 양손 기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중략) 구청에서 황당한 통지서가 왔습니다. ‘아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활동지원 시간을 월 120시간 삭감하겠다.’, 제가 받던 활동지원 시간은 월 270시간이었습니다. 그중 120시간을 빼면 겨우 150시간이 남습니다. 아들이 제 집으로 주소를 옮기면 제가 갑자기 걸을 수 있게 됩니까?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까? 혼자 씻고, 옷을 입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전화와 관공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됩니까?” - 어느 아버지의 SNS 게시물 중
“〇〇(자녀)가 다리 같은 거 차고 이렇게 탁 때리면 엄청 아프거든요. (중략) 〇〇가 금요일날 온다 하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에요. 일주일 내내. 월요일, 화요일까지는 마음이 조금 푸근해요. 근데 수요일이 지나고 나면 목요일이잖아요. ‘내일은 〇〇 오는구나’. 금요일날 당일에는 마음 단단하게 먹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 24시간형 이용 부모의 인터뷰 중
“우리 부모님들도 발달장애 아이들 키우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혼자서 소통도 잘 못하니 부모들이 하루종일 돌봐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하루종일 매여서 살아야 하는 그런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도 부모님들은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서 끝까지 돌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인 것 같습니다.” - 2018년 9월 12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 발표 및 초청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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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서울지하철 삼각지역 1·2번 출구 개찰구 근처에 설치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이윽고 중증장애인 가족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참사 문제가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랐다. 8월 11일, 보건복지부는 정부 부처 합동으로 수립한 「돌봄·간병 부담 자살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에서도 여전히 참사의 원인과 대책은 가족 내에서 시작해 가족 내에서 끝났다. 정부가 인식한 문제의 원인은 ‘나홀로 돌봄 → 고립 및 소진 심화 → 돌봄자 위기 심화 → 자살 위험 증가’였다. 정작 ‘나홀로 돌봄’을 낳는 원인, 즉 ‘가족 부양’이라는 기본값은 빠져 있었다. 왜 가족이라는 이유로 돌봄을 감당해야 하고,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돌봄을 박탈당해야 하는가, 그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진단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찾은 ‘자살 고위험 가구’는 돌봄 부담을 나눌 다른 가족이 없는 가구(2인 가구),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만으로 구성된 가구, 또는 조금 더 확대하면 지금의 가족 휴가 제도나 활동지원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가구다. 실제 해법도 피부양자에 대한 기존 돌봄 제도의 연계와 부양자에 대한 ‘마음건강’, ‘정신건강’ 지원 연계에 머물렀다. 장애와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비극으로 바라보는 담론, 가족 내 존비속 살해와 자살 문제를 개인과 가족의 정책적 무지나 심리적 붕괴 탓으로 돌리는 기존의 서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부모를 모실 책임이 전적으로 자녀에게 있다’는 데 동의한 비율은 약 20년 전 52.6%에서 20.6%로 떨어졌다. 국민 5명 중 1명만이 동의하는 셈이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집에서 어머니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예전에는 64.7%가 동의했다면, 이제는 33.8%로 그 수준이 낮아졌다. 그러나 부모 부양은 자식 몫이라거나 자녀 양육은 엄마 몫이라는 믿음이 낡은 것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유독 ‘장애인의 부양은 가족이 일차적으로 책임진다’는 국가의 전제만큼은 참으로 건재한 듯하다.
가족 부양은 ‘정상 가족’의 제1 도덕이다. 국가가 바라는 정상적인 가족은 자립적인 가족이었다. 자기 가족 구성원이 살아가는 데 있어 다른 가족이나 사회에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특별한 부담을 요구하지 않는 것, 자체적으로 돌보는 능력을 갖추는 것 말이다. 이 믿음 위에서 무언가 새로워 보이는 이름의 정책들이 제안되고, 때때로 ‘권리’, ‘자립’, ‘돌봄’과 같은 유행과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결국 장애인이(장애인의) 가족이 되는 순간, 혹은 가족이 생기는 순간 실체를 드러낸다.
‘자기결정권’이라는 법적 개념이 존재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설의 입‧퇴소는 부양의무를 지닌 자가 부양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가에 따라(즉, 가족의 의사에 따라) 달라진다. ‘자립생활’이라는 제도의 목표는 강조되지만, 가족을 이루거나 가족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은 그만큼 본인의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이 말은 가족이 되는 상대방은 그 이상의 시간을 내놓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국가책임’이라는 정책의 방향이 홍보되지만, 탈시설화와 통합돌봄 어디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무엇을 어떻게 분명히 책임지는지는 알 수 없다.
흔히 장애인 정책 담론이 시혜와 치료 중심에서 인권과 자립 중심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목격해 온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늘 다른 가족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한 분투와 사회의 폐가 되지 않기 위한 사투 사이에 있었다. ‘이제는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과 ‘이제는 가족이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 있었고, 가족이 없으면 내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과 가족이 있어 영영 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사이에 있었다. 내가 경험해 온 장애인 정책의 담론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같은 모습의 ‘가족 돌봄 부담 경감’, 그를 통한 ‘사회 돌봄 부담 경감’에 가까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재명 정부는 ‘돌보는 가족’의 강화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돌봄통합지원법과 장애인지역사회자립법의 제대로 된 시행을 위해서라도 나홀로 돌봄을 불러온 가족 부양이라는 전제 자체를 손보아야 한다. 적어도 세 가지는 시작하자. 장애인서비스지원 종합조사와 활동지원서비스 같은 주요 도구와 정책에서 가족의 존재와 동거 여부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삭제하자. 각 구·군은 학령기 이후 성인기로 접어드는 중증장애인에 대해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자립생활을 위한 개인별 지원계획을 의무적으로 수립하고, 정부는 이에 필요한 예산을 단계적으로 편성하자. 마지막으로 각종 서비스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성인기 이후의 삶에 대한 지원은 공공이 주된 책임자 역할을 맡도록 규정하자.
개별화(individualization)의 시작은 분리다. 장애인 당사자는 당사자의 삶을, 가족은 가족 그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가족이 사라져야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
“〇〇(자녀)가 다리 같은 거 차고 이렇게 탁 때리면 엄청 아프거든요. (중략) 〇〇가 금요일날 온다 하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에요. 일주일 내내. 월요일, 화요일까지는 마음이 조금 푸근해요. 근데 수요일이 지나고 나면 목요일이잖아요. ‘내일은 〇〇 오는구나’. 금요일날 당일에는 마음 단단하게 먹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 24시간형 이용 부모의 인터뷰 중
“우리 부모님들도 발달장애 아이들 키우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혼자서 소통도 잘 못하니 부모들이 하루종일 돌봐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하루종일 매여서 살아야 하는 그런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도 부모님들은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서 끝까지 돌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인 것 같습니다.” - 2018년 9월 12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 발표 및 초청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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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서울지하철 삼각지역 1·2번 출구 개찰구 근처에 설치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 모습. 사진 비마이너DB
이윽고 중증장애인 가족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참사 문제가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랐다. 8월 11일, 보건복지부는 정부 부처 합동으로 수립한 「돌봄·간병 부담 자살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에서도 여전히 참사의 원인과 대책은 가족 내에서 시작해 가족 내에서 끝났다. 정부가 인식한 문제의 원인은 ‘나홀로 돌봄 → 고립 및 소진 심화 → 돌봄자 위기 심화 → 자살 위험 증가’였다. 정작 ‘나홀로 돌봄’을 낳는 원인, 즉 ‘가족 부양’이라는 기본값은 빠져 있었다. 왜 가족이라는 이유로 돌봄을 감당해야 하고,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돌봄을 박탈당해야 하는가, 그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진단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찾은 ‘자살 고위험 가구’는 돌봄 부담을 나눌 다른 가족이 없는 가구(2인 가구),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만으로 구성된 가구, 또는 조금 더 확대하면 지금의 가족 휴가 제도나 활동지원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가구다. 실제 해법도 피부양자에 대한 기존 돌봄 제도의 연계와 부양자에 대한 ‘마음건강’, ‘정신건강’ 지원 연계에 머물렀다. 장애와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비극으로 바라보는 담론, 가족 내 존비속 살해와 자살 문제를 개인과 가족의 정책적 무지나 심리적 붕괴 탓으로 돌리는 기존의 서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부모를 모실 책임이 전적으로 자녀에게 있다’는 데 동의한 비율은 약 20년 전 52.6%에서 20.6%로 떨어졌다. 국민 5명 중 1명만이 동의하는 셈이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집에서 어머니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예전에는 64.7%가 동의했다면, 이제는 33.8%로 그 수준이 낮아졌다. 그러나 부모 부양은 자식 몫이라거나 자녀 양육은 엄마 몫이라는 믿음이 낡은 것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유독 ‘장애인의 부양은 가족이 일차적으로 책임진다’는 국가의 전제만큼은 참으로 건재한 듯하다.
가족 부양은 ‘정상 가족’의 제1 도덕이다. 국가가 바라는 정상적인 가족은 자립적인 가족이었다. 자기 가족 구성원이 살아가는 데 있어 다른 가족이나 사회에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특별한 부담을 요구하지 않는 것, 자체적으로 돌보는 능력을 갖추는 것 말이다. 이 믿음 위에서 무언가 새로워 보이는 이름의 정책들이 제안되고, 때때로 ‘권리’, ‘자립’, ‘돌봄’과 같은 유행과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결국 장애인이(장애인의) 가족이 되는 순간, 혹은 가족이 생기는 순간 실체를 드러낸다.
‘자기결정권’이라는 법적 개념이 존재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설의 입‧퇴소는 부양의무를 지닌 자가 부양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가에 따라(즉, 가족의 의사에 따라) 달라진다. ‘자립생활’이라는 제도의 목표는 강조되지만, 가족을 이루거나 가족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은 그만큼 본인의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이 말은 가족이 되는 상대방은 그 이상의 시간을 내놓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국가책임’이라는 정책의 방향이 홍보되지만, 탈시설화와 통합돌봄 어디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무엇을 어떻게 분명히 책임지는지는 알 수 없다.
흔히 장애인 정책 담론이 시혜와 치료 중심에서 인권과 자립 중심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목격해 온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늘 다른 가족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한 분투와 사회의 폐가 되지 않기 위한 사투 사이에 있었다. ‘이제는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과 ‘이제는 가족이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 있었고, 가족이 없으면 내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과 가족이 있어 영영 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사이에 있었다. 내가 경험해 온 장애인 정책의 담론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같은 모습의 ‘가족 돌봄 부담 경감’, 그를 통한 ‘사회 돌봄 부담 경감’에 가까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재명 정부는 ‘돌보는 가족’의 강화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돌봄통합지원법과 장애인지역사회자립법의 제대로 된 시행을 위해서라도 나홀로 돌봄을 불러온 가족 부양이라는 전제 자체를 손보아야 한다. 적어도 세 가지는 시작하자. 장애인서비스지원 종합조사와 활동지원서비스 같은 주요 도구와 정책에서 가족의 존재와 동거 여부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삭제하자. 각 구·군은 학령기 이후 성인기로 접어드는 중증장애인에 대해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자립생활을 위한 개인별 지원계획을 의무적으로 수립하고, 정부는 이에 필요한 예산을 단계적으로 편성하자. 마지막으로 각종 서비스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성인기 이후의 삶에 대한 지원은 공공이 주된 책임자 역할을 맡도록 규정하자.
개별화(individualization)의 시작은 분리다. 장애인 당사자는 당사자의 삶을, 가족은 가족 그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가족이 사라져야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