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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장애 영역에서의 ‘뉴노멀’, 시혜를 넘어 권리가 일상이 되는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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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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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불과 몇 해 전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 우리 사회는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단어를 일상화 되었다. 마스크가 당연해지고 비대면 서비스가 표준이 된 세상을 우리는 새로운 질서로 받아 들어졌다.

하지만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간과한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이 새로운 표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동안 장애인에게 ‘노멀(Normal)’이란 곧 배제와 분리, 그리고 시혜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시설에 격리되거나, 계단 앞에서 멈춰 서거나, 키오스크 화면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서글픈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장애계는 이 낡은 표준(Old Normal)을 깨고, 장애인의 권리가 당연한 상식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뉴노멀을 선언하고 있다.

디지털 장벽, ‘배려’에서 ‘법적 의무’로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한 뉴노멀은 디지털 전환이다. 비대면 키오스크, OTT 스트리밍, 스마트폰 앱은 이제 삶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편리한 기술은 거대한 벽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각장애인이 음성 안내 없는 키오스크 앞에서 한 끼 식사를 포기하고, 청각장애인이 자막 없는 영상 콘텐츠에서 소외되는 현실은 더 이상 개인의 불편함으로 치부될 수 없다.

여기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바로 선진 외국의 단호한 대응이다. 유럽연합(EU)의 ‘유럽 접근성법(EAA)’이 대표적이다.

이 법은 단순히 공공기관에만 접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민간 기업의 스마트폰, 은행 서비스, 전자상거래 시스템이 접근성을 갖추지 못하면 시장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 접근성은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CSR)이 아니라, 제품의 하자를 결정짓는 ‘품질의 표준’이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 역시 접근성을 ‘해주면 좋은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디지털 뉴노멀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포용’에 있기 때문이다.

시설을 넘어 지역사회로, ‘삶의 공간’을 재정의하다

장애계 뉴노멀의 두 번째 축은 ‘탈시설’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거대한 시설에 수용해 왔다. 하지만 팬데믹 당시 집단 수용 시설에서 발생한 높은 치명률은 시설 보호라는 ‘낡은 표준’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스웨덴은 이미 1990년대에 ‘LSS 법’을 통해 대규모 수용 시설을 폐쇄하고 지역사회 자립을 국가의 의무로 정립했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활동 지원사의 도움을 받으며 이웃과 섞여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복원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시설이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버스를 타는 풍경이 지극히 당연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간의 뉴노멀일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다시 묻다: 생산성에서 권리로

뉴노멀은 노동의 정의마저 바꾸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곧 ‘이윤 생산’을 의미했다. 이런 잣대 아래에서 최중증 장애인들은 늘 ‘노동 불가능자’로 분류되어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최근 논의되는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는 노동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있다. 장애인이 거리에 나와 장애인 권익을 옹호하고, 인권 침해를 모니터링하며,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공연하는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와 ‘인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동이 단순히 생계 수단을 넘어, 한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여하고 연결되는 통로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장애가 있어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뉴노멀의 모습인 것이다.

뉴노멀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유니버설 디자인’의 마음가짐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첫째, ‘동정’이 아닌 ‘동료 시민’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장애인을 도와줘야 할 사회적 약자로만 보는 시각은 시혜적 정책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그들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제도와 법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일상화해야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장애인만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다. 계단을 없앤 경사로는 유모차를 끄는 부모와 무릎이 아픈 어르신에게도 편리함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큼직한 자막은 소음 속의 비장애인에게도 유용하다. 장애인을 위해 장벽을 낮추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커브 컷 효과(Curb Cut Effect)’를 가져올 수 있다.

셋째,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장애인을 떠올리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미국의 FEMA(연방재난관리청)가 재난 대응 계획 단계부터 장애인 전담 부서를 참여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안전한 사회가 우리 모두에게도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거나 ‘잠시 비장애인’인 삶을 살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한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할수록 장애의 영역은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장애계의 뉴노멀은 특정 소수를 위한 특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맞이할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안전장치이다.

장애계가 외치는 뉴노멀의 핵심은 간결하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일상”인 것이다. 이제 정치는 법으로, 기업은 기술로, 시민은 인식으로 이 새로운 표준에 화답해야 할 때이다.

턱이 없는 상점, 막힘 없는 웹사이트, 시설이 아닌 이웃집에 사는 장애인 동료. 이 풍경들이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진정한 노멀’의 시대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